2006년 첫 내한 전, 노엘 갤러거와 일대일로 인터뷰했다. 오래전이라 희미하지만 하나만은 기억한다. 새 앨범 빼고 최고작은 무엇이냐? 그는 이렇게 말했다. 1집. 예상치 못한 대답이라 다시 한번 확인했다. 2집 아니고? 그의 주장은 확고했다. 1집.
2집 <모닝 글로리(Morning Glory)?>는 오아시스의 최대 히트작이다. 어디선가 들어봤을 ‘돈 룩 백 인 앵거(Don’t Look Back in Anger)’를 비롯해 ‘원더월(Wonderwall)’ ‘샴페인 슈퍼노바(Champagne Supernova)’ 등의 히트곡이 터졌다.
그러나 1집 앨범 <데피니틀리 메이비(Definitely Maybe)>는 오아시스 그 자체다. 젊고, 도발적이다. 패기가 넘친다. 앨범 전체에서 조금도 타협하지 않겠다는 야심 같은 게 느껴진다. 리엄 갤러거의 보컬은 또 어떤가. 저렇게 허리 굽힌 채 생목으로 질러대면 성대 나가지 않겠냐고 되묻지 마라. 내 몸은 내가 알아서 챙긴다. 평범한 인간은 오지도 않은 미래를 걱정하며 살지만, 로큰롤 스타는 다르다. 로큰롤 스타는 오직 오늘만 산다.
수록곡 중 ‘슈퍼소닉(Supersonic)’, 그리고 무엇보다 ‘로큰롤 스타(Rock ‘N’ Roll Star)’가 증명한다.
단지 음악만은 아니다. 재개봉한 다큐멘터리 <슈퍼소닉>(사진)에서 리엄 갤러거는 말한다. 좋은 밴드는 음악만으로는 안 돼. 재미가 있어야 한다고. 우린 둘 다 갖춘 훌륭한 밴드지. 그렇다. 음악은 기본에 거침없는 언행이 더해져 통쾌함을 선물했다고 볼 수 있다. 진정한 슈퍼스타는 음악만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음악 외에 그 누구와도 다른 개성을 갖춰야 슈퍼스타 반열에 오를 수 있다.
지난 20년간 청년층(19~34세)은 취업이나 학업을 위해 수도권으로 몰리는 반면, 중장년층(40~64세)은 쾌적한 자연환경 등 삶의 질을 중시해 지방으로 이주하는 사례가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지난해에는 전북 전주, 경남 창원 등의 청년층이 일자리를 찾아 수도권으로 많이 이동해왔다.
통계청이 17일 발표한 ‘최근 20년간 수도권 인구이동’을 보면 수도권은 2011년 처음으로 유입인구보다 유출인구가 많은 순유출 상태를 기록했지만 2017년부터는 다시 순유입으로 전환됐다. 2010년대 공공기관 지방 이전과 정부 부처의 세종시 이전으로 한때 인구가 빠져나갔지만 이전이 마무리된 2017년 무렵부터는 수도권 유입세가 다시 두드러진 것으로 분석된다.
통계청은 전입 사유별 순 이동 통계의 정확성을 높이기 위해 1인 가구만을 대상으로 삼았다.
세대별(1인 이동 기준)로 살펴보면, 청년층은 수도권으로의 순유입이 계속됐으며 수도권으로 이동하는 주된 이유로는 직업과 교육이 가장 많이 꼽혔다. 청년들은 지난 20년간 부산, 대구, 광주, 대전, 울산 등 11개 시도에서 꾸준히 수도권으로 순유입 했다.
특히 지난해 기준으로 비수도권 시군구 중에서 수도권으로 청년층 순유입 인원이 가장 많았던 곳은 전북 전주시, 경남 창원시, 대구 달서구 순이었다. 통계청은 이들 지역 청년들이 주로 일자리와 학업을 위해 수도권으로 이동한 것으로 분석했다. 한때 제조업 중심 도시였던 창원시는 청년층 유출이 가장 심각한 기초자치단체이기도 하다. 일할 공장들이 줄어들면서 이 지역의 청년들이 수도권으로 대거 유입되고 있는 것으로 풀이된다.
반면 중·장년층은 2007년부터 수도권에서 빠져나가는 인구가 더 많은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지난해 중·장년층은 자연환경과 주택 등을 이유로 수도권을 떠나는 경우가 많았다. 지난해 수도권을 떠난 중·장년층은 충남 아산시와 천안시, 충북 청주시로 가장 많이 향했다. 통계청 관계자는 전반적으로 중·장년층은 자연환경을 수도권을 떠난다면서도 충남 아산, 천안 등으로 많이 가는 이유는 이곳에 주로 산업단지가 몰려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수도권 내부 이동을 살펴보면, 서울은 최근 20년 동안 지속적으로 인구가 줄고 있었다. 이들이 서울을 떠난 이유로는 ‘주택’을 가장 많이 꼽았다. 서울을 빠져나간 청년층과 중장년층 모두 주로 경기도로 이동하는 경향이 뚜렸했다.
그러나 비수도권 지역에서 청년층은 서울, 경기, 인천 순으로 이사를 왔다. 비수도권에서 서울로 먼저 이사한 뒤 다시 경기나 인천으로 옮겨가는 청년층이 많다는 의미다. 중장년층의 경우 서울, 인천, 경기도 모두에서 2008년 이후 순 유출이 계속되고 있다.
본관이 어디냐는 질문에 잠시 눈앞이 하얘졌다. 우물쭈물하니 친구의 아버지가 먼저 요즘엔 성을 묻는 사람이 잘 없지 하고 속을 헤아려줬다. 대체 어른들은 남의 집 족보가 왜 궁금한 걸까? 그게 어른들한텐 일종의 MBTI 같은 거지. 친구는 자신의 아버지를 변호하듯 멋쩍게 말했다. 나는 친구 아버지가 준 배 한 상자를 트렁크에 실으며 호쾌하게 웃었다. 친구야, <범죄와의 전쟁>에서 최익현(최민식)은 ‘어디 최씹니까?’라는 질문 하나로 주먹 세계의 실세가 됐어. 한국 사회에서 뿌리를 안다는 건 그만큼 강력한 힘인 거야. 참… 난 경주 최씨도 아닌데 이렇게 좋은 배를 받아도 되는 건지…
본관을 알려준 대가로 받은 배는 달고 시원했지만, 남의 족보를 묻는 게 거북하다는 내 생각엔 변함이 없었다. 경상도 집성촌에서 조선시대부터 대를 이어 살아온 나의 조부모는, 내가 겨우 말을 뗐을 때부터 가문의 큰 인물이 세운 업적들을 읊어주던 분들이었다. 400년 전 죽은 내 조상의 기분까지 알고 싶지 않았던 나는, 하루라도 빨리 그들의 밑에서 탈출하려 안간힘을 썼다. 가문의 영광을 다 왼다 해도 결국 다른 집안의 며느리로 살아갈 미래뿐인 손녀는 그것이 하나도 미안하지 않았다.
종로3가는 정말 좋지 않니. 악기를 든 사람, 영화를 보는 사람, 직장인, 노인, 게이들… 모든 사람이 은은한 수육 냄새를 뒤집어쓰고 어두운 지하상가 밑을 걸어야 하잖아. 나에게 서울이란 영원히 종로다. 열일곱 살이던 2006년엔 박찬욱을 좋아하던 친구와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에릭 로메르의 <여름 이야기>를 봤다. 영화가 끝난 후 우리는 밤공기에 취해 넓은 보폭으로 춤을 추듯 걸었다. 바쁘게 종로를 누비는 서울 사람 중 하나가 되어서. 마치 서울의 모든 곳이 우리의 땅이라도 된 것처럼.
밤이 너무 길어
영화 <3670>의 주인공 철준(조유현)이라면 그날 밤 출장용접 내가 느낀 감정을 알고 있을 것이다. 동성애자인 철준은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하며 대학 입시를 준비하는 탈북청년이다. 그는 ‘새터민 장학금’을 주는 교회와 탈북민 모임 등에 참여하며 한국 사회에 적응하기 위해 노력하지만, 늘 ‘게이 친구’를 사귀고 싶다는 갈증에 시달린다. 그런 철준에게 종로3가란 진정한 정착을 위한 마지막 관문이자, 황홀한 욕망이다. 날이 어두워지면 혈관 같은 골목마다 촘촘히 뻗어 있는 ‘이쪽’의 공간들이 철준의 눈앞에 펼쳐진다. 데이팅 앱의 알림 소리와 ‘쿵쿵’ 울리는 음악 소리가 심장 박동과 함께 화려한 리듬을 만드는 종로는 아마도 철준이 정착하고 싶었을 바로 그 환상 속 타향이다.
하지만 작심하고 나간 종로 ‘술 번개’에서 철준은 끝내 누구와도 연결되지 못한 채 집으로 돌아온다. 쓸쓸함에 켠 데이팅 앱에는 ‘탈북민 친구를 찾는다’는 자기소개를 비아냥거리는 메시지만 쌓인다. <3670>은 철준을 통해 타자가 내부로 편입되는 것이 얼마나 사소하고 반복적인 거절들로 이루어지는지, 또 탈북자이자 동성애자라는 이중의 소수자성이 철준의 위치를 얼마나 위태롭게 만드는지를 말하며 그런 철준을 환대하는 인물 영준(김현목)을 통해 그럼에도 ‘나’라는 존재를 부정당한 이들이 어떻게 서로를 돌볼 것인지, 그 연대가 가능한 공간의 조건은 무엇인지를 질문한다.
뿌리가 잘린 사람들
우리는 ‘내부’와 ‘외부’를 어떻게 구분할까? 철준과 내가 서 있던 종로는 그 구분을 밤마다 바꿔 적는 동네였다. 수육 냄새에 내 정체를 감출 수 있는 수상한 은신처로, 환상과 좌절을 모두 맛보게 하는 얄미운 종착지로. 안과 밖을 구분할 수 없는 이런 공간은 뿌리가 잘린 사람들에겐 그 묘한 품을 내어주는 상실감의 고향이다.
가족의 역사를 통해 나를 이해하는 건 인간에게 무척 중요한 실천이지만, 한국 사회에서 ‘뿌리’를 찾는다는 건 곧 타인을 차별할 무기가 되기에, ‘혈통’ ‘출신’, 나아가 ‘정체성’에 대한 질문은 언제나 껄끄럽다. 그런 추궁을 즐기는 사람들은 ‘무시해도 될 만한 것’을 구분하고, ‘이익이 되지 않는 정체성’을 자연스레 줄 세운다. 그들에게 인간의 정체성이란 고정된 실체이며, 맥락을 지니지 못하는 텅 빈 개념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광장에서, 영사관 앞에서, 명동에서, 인스타그램과 유튜브 댓글에서. 그들은 우리 사회를 함께 이루고 있는 종족에게 멸시를 쏟아내느라, 세상이 얼마나 다양한 뿌리로 얽혀 있는지 깨닫지 못하고 세상을 뿌리 없는 조화로 메우기 위해 핏대를 세운다.
인간의 뿌리는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돋아난다. 서로의 흔적을 엮어 매일 새로운 고향을 만들 수 있다면, 그리고 그것을 감히 정착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우리의 지형은 어떻게 달라질까? 하나 아쉬운 점이 있다면 ‘네 땅으로 돌아가라’를 외치는 사람에게도 그런 이동과 정착의 자유가 주어진다는 것이겠지.